2006. 10. 20.
[상영중] ... Fr. 이현철
*"반딧불이의 묘"*
(Grave of the Firefiles, 火垂るの墓. 1988)
'반디불이의 묘'는 1945년 일본 패전을 전후로 한
일본 고베지역 두 남매의 이야기입니다.
좀더 정확히 이야기 한다면 두 남매의 "죽음"의 이야기이지요.

"나는 소화20년 9월에 죽었다"
또 다른 죽은 자(세츠코 - 여동생) 의 동면으로 끝맺음합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반딧불로 이어지며,
이 영화의 제목인 <반디불의 묘>는 세츠코가 반디불의 무덤을 만들 때 했던 말처럼
죽은자가 잠을 자는,
세츠코와 세이다의 묘이며 안식처인 것입니다.
그들은 죽어서야 비로서 안락한 곳으로 찾아갈 수 있었지요.
<반디불의 묘>는 전쟁에 대한 영화입니다.
그렇지요..분명히 전쟁의 어느 암울하고 비극적인 구석에 대한 영화인 것입니다.
그러나 <반디불의 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반전영화와는 조금 거리가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반디불의 묘>의 초반 전개는 충실히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데 바쳐져 있습니다.
B29의 공습과 폐허가 된 도시, 구더기가 스물거리는 엄마의 시체,
엄마를 찾으며 우는 소녀와, 그를 달래는, 역시 어린 소년,
그리고 그의 무한이 이어지는 롱쇼트의 황혼녘 철봉 재주넘기까지...
그것은 분명한 전쟁의 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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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반디불의 묘>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엄마의 죽음 이후로 극의 양상은 급격히 변화합니다.
그것은 최초로 친척 아주머니와의 관계에서 모습을 드러내지요.
즉 전쟁과 인간의 대립적 형상이 인간(사회)과 개별적 인간의 대립으로 구체화 됩니다.
이 대목을 혹시나 "아주머니"의 개인적인 인간성 문제로 축소해서 간과해 버릴지도 모르는
여러 사람들을 위하여 작가는 더욱 더 많은 대답들을 작품 속에 준비해 놓고 있습니다.
사실상 이 이후의 극은 사회와 개별적 인간 (특히 전쟁에 의해서 버려진 - 엄마는 전쟁통에 죽고,
아버지는 전쟁터에서 죽은 극중의 자매와 같은 - 인간) 사이의 대립적 형상을 묘사하는데 바쳐집니다.
"세이다"가 먹을 것이 없냐고 물어봤던 선량한 농부의 대답,
동생이 아파서 그랬다는 데도 "세이다"를 두들겨패며 경찰서로 끌고가는 농장주인,
선량한 척 하다가도 "배고프면 물이나 먹어라"며 돌려보내는 경찰,
오빠가 맞으며 끌려가는 모습을 저 만치서 울부짖으며 바라보던 "세이코",
공습이 시작되면 오히려 신이나서 죽음을 무릅쓰고 도둑질을 하는 "세이다"
(이미 세이다는 폭격이나 전쟁이 아닌 일본사회와 주변의 어른들을 적으로 돌렸습니다.
미군 폭격은 이제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들 남매를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폭격에 불타는 집들을 보며 통쾌해 하는 세이다의 모습은 진정 그들 남매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 누군인지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
전쟁의 와중에서도 "얼음"을 들여다 먹으며 사는 사람들, 무관심한 의사,
귀신이 나온다며 남매의 보금자리를 비웃는 아이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마자 - 언제 전쟁이 있었냐는 듯 - 화려한 옷차림으로 되돌아 온 부유한 가족의 모습과,
그 집에서 풍금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죽은 "세츠코"의 환영이 그들 남매의 남루한 보금자리 주변을 이리저리 뛰노는 장면까지...
작가의 시선은 폭넓게 당시 사회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이를 통해 남매를 죽음으로까지 내몬 실체를 (남매에게) 대책없이 주어진 "전쟁"이나
"성격 고약한 아주머니"가 아닌 "일본 사회"로 확대시키는 것입니다.
남매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것은 전쟁이 아닙니다.
남매를 죽인것은, 저 전쟁으로 상처받고 버려진 "어린 아이들"을 죽인 것은,
그들 스스로 벌여놓은 전쟁에 대하여 책임질 줄 모르는 "어른들의 사회"입니다.
작가는 전쟁을 비난하기보다는 오히려 일본사회를 통렬히 비난합니다.
불타는 도시에서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는 패잔병의 역설과
"국가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친척 아주머니의 가식적인 태도,
전쟁의 패배를 무덤덤히 지껄이며,
"군함따위가 남아 있을리 없지"라며 냉소적으로 남매아버지의 죽음을 단정지어 버렸던 어른들,
작가는 그들의 이율배반을 어린이의 눈으로 보여줍니다.
그러하기에 그들 - 살아남은 어른들이 재건시켜놓은 일본 사회의 "빌팅숲"과 어우러진 반딧불의 불빛은,
전쟁과 "사회"에 희생당한 "어린 반딧불"들의 영혼이며,
사회적 이율배반을 고발하는 전언이며,
"죽은 자"들을 위한 장엄한 진혼곡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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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 사족]
흔히들 <반디불의 묘>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이 영화가 전쟁의 가해자인 "일본"을 전쟁의 피해자로 묘사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되묻고 싶습니다.
대체 이 영화의 어느 부분이 일본을 피해자로 그리고 있다는 것인지 말입니다.
<반디불의 묘>가 피해자로 묘사하는 것은 불쌍한 남매뿐입니다.
그리고 이 남매를 죽음으로까지 몰고간 진정한 가해자는 전쟁이 아닌,
전쟁이라는 배경을 등에 업고 (전쟁중이라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하며)
남매를 죽인 (친척아주머니, 경찰, 의사, 하다못해 동네꼬마들까지 포함한)
즉, 일본사회라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분명 이 작품은 반전의 메세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만
그보다는 전쟁이라는 배경하에서 사회(다수의 인간 혹은 어른들)에 의해서 희생되어 가는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인간 혹은 사회적 약자의
(아이들이 대표적이겟지만 꼭 아이들만도 아닙니다.) 모습을
그려내는데 더욱 큰 비중을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評 : 이현철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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