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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보현산맥

*[기아.환경]'침묵의 봄' - 레이철 카슨

2007. 3. 2.

 

'침묵의 ...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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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0

내 인생 내 지게에 지고,

--- 보현골 입찰중 ---

.

 

 

먼 훗날 '웅이 아버지' 전설 기억하라실 때

낡은 포터 바꿔끌고 꾸역꾸역 올라 가시더라고,

'그렇게 웅이 아부지는 기룡산 중턱에서 굶어 죽고,'

빵부스러기로 환생한 것 같더라고

.......

 

                                 

 

*'침묵의 봄'*

======================== 레이철 카슨  =======================


"우리 인류는 지금 역사상 유례가 없는 심각한 국면에 처해 있다.

우리가 이겨야 할 대상은 결코 자연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다.

우리는 미숙하고 유치한 자연관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좀더 성숙한 눈으로 자연을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들 자신의 문제를 깨달아야 한다.

인간과 자연, 둘 중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정복하거나 지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 인간은 엄청난 우주의 아주 작은 일부일 따름이다."    
   

- 레이철 카슨, 1963년 4월 CBS 방송 연설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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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경재앙을 경고한 환경운동의 선구자 ]

 

1939년 스위스 화학자 파울 뮐러는 해충을 박멸할 수 있는 화학물질 DDT를 개발했다.

해충에 의한 농업 생산량 감소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말라리아의 창궐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되자, 학계는 해충박멸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인간과 동물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던 살충제 DDT는 획기적인 제품으로 각광을 받았다. DDT의 발명으로 농업 생산성 향상에 일대 혁명이 일어났으며, 말라리아에 의한 사망률 또한 감소추세로 돌아섰다.

DDT는 최소 면적의 농지에서 최대의 수확량을 올릴 수 있는 기적의 물질로 불리게 되었으며, 이를 개발한 뮐러 박사는 그의 업적을 인정받아 노벨화학상 수상자가 되는 영예를 안았다.

 

그 후 DDT는 해충 박멸에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여겨져 해로운 곤충 박멸뿐 아니라 귀찮게 여겨지는 곤충을 제거하는 데에도 무분별하게 남용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DDT가 동물이나 인간의 체내에 축적되어 만성적인 질환을 유발시키는 무서운 독성을 지닌 물질이라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현재는 DDT의 잔류독성에 대한 문제점이 널리 알려져 전 세계에 마구잡이로 사용되던 살충제 DDT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하지만 한 여성의 숭고한 노력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DDT의 해악을 깨닫지 못한 채 끔찍한 죽음을 맞게 되는 위기에 처해졌을 지도 모른다. 암과 투병하면서도 4년에 걸쳐 면밀히 분석한 자료를 토대로 DDT의 해악에 대한 타당성을 제시하며 차분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논조로 당시 잠들어 있던 대중을 일깨운 여성.

1962년 화제작 「침묵의 봄」을 출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5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 환경 운동의 선구자 ‘레이철 카슨’ 여사가 바로 그 역사의 주인공이다.

자연을 벗 삼은 유년시절의 레이철

1907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스프링데일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낸 레이철 카슨은 자연을 사랑하고 글쓰기를 좋아했던 총명한 문학소녀였다. 내성적이며 소심했던 그녀는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큼은 누구보다도 진취적이며 적극적으로 임했다. 그녀의 주변 사람들은 매사에 꼼꼼하고 차분한 성격이면서도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그녀를 좋아했다.  

학창시절 레이철은 줄곧 장학금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학업 성적이 월등했으며, 특히 작문 실력에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녀의 글쓰기 재능에 감동한 이들은 한결같이 레이철이 훌륭한 작가가 될 것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펜실베이니아 여자대학(현재 채텀대학)에 입학한 지 2년 만에 우연히 듣게 된 생물학 강의에 매료된 레이철은 영문학이던 전공과목을 생물학으로 바꾸는 용단을 내린다.

당시 여성 과학도는 인정을 받지 못할뿐더러 직업 선택의 폭 또한 엄격히 제한되어 있어 과학 분야로 전공을 바꾸는 것에 대해 만류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뒤늦게나마 자신이 추구하던 세계를 찾은 듯 주저함 없이 과학의 세계로 빠져든다.

 

레이철 카슨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어머니

레이철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는 그의 어머니였다. 당시 여성들에게 교육의 혜택이 주어지지 않던 시절 레이철의 어머니는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출신의 여성이었다. 1남 2녀 자녀 가운데 막내인 레이철을 유난히 아끼고 사랑했던 어머니는 그녀를 데리고 산책을 즐기곤 했다. 자연을 사랑하고 그 속에 살고 있는 각종 생물체에 대해 관심이 많은 어린 레이철이 질문을 할 때마다 자상하게 가르쳐 주었고, 처음 보는 생물이 발견되면 백과사전을 뒤져서라도 사랑하는 딸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주곤 했다.

이와 더불어 자연과 함께 살고 있는 모든 생물체에 대한 중요성을 가르쳐 주었으며, 어머니 품과 같은 자연을 사랑하는 법에 대해 강조하는 것 또한 빼놓지 않았다.

 

훗날 레이철이 수많은 방해와 거센 비난 속에서도 살충제의 오·남용이 불러 올 재앙을 경고하는 데 있어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던 것은 어린 시절 그녀의 어머니가 심어준 자연에 대한 사랑이 가슴 속 깊숙이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누구보다도 살충제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레이철과 의견을 같이 하며 살충제의 오·남용을 막을 수 있는 글을 완성해 주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당부가 있었기에 「침묵의 봄」의 집필에 더욱 매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도 레이철의 어머니는 레이철의 뒷바라지에 최선을 다했다. 레이철이 우수한 성적으로 펜실베이니아 여자대학에 입학했을 당시에도 입학금과 기숙사 비용은 턱없이 모자랐다. 그래도 어머니는 레이철을 안심시키며 그동안 해오던 피아노 강습을 더 많이 하고, 돈이 될 만한 물건이라면 모두 팔아 레이철이 교육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58년, 아흔 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레이철의 어머니는 레이철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용기를 북돋아 주는 버팀목과 같은 존재였다.

 

쉬운 필치로 미지의 바다세계 소개해 인기 구가

생물학자가 되면서 작가의 꿈은 사라진 듯 보였으나 레이철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게 되는 행운을 얻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은 그녀를 쉴 새 없이 일하도록 부추겼고 이는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생계비 마련을 위해 닥치는 대로 일감을 찾고 있던 중 때마침 해양생태계에 대한 라디오 방송 원고를 청탁받게 되면서 그녀는 자신의 전공분야를 문학적 재능을 통해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그녀에게 허술함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꼼꼼한 성격 탓에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올 때까지 고치고 새로 작성하는 일을 수없이 반복했다.  

 

특히 성실한 라디오 원고 집필이 계기가 되어 미 수산자원국(현 수산자원 및 야생생물 관리국)에 채용되면서부터 바다에 관련된 여러 권의 책을 출간해 내기에 이른다. 레이철은 일반인에게 미지의 바다 세계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 주며 해양생태계의 보호를 호소했다. 이해하기 쉬운 문체로 흥미롭게 그려낸 바다 속 이야기는 미 전역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과학자들의 전유물이었던 분야를 일반인들에게 쉽게 전달해 주는 중재자의 역할을 기꺼이 자청한 셈이다.

 

「해저」라는 제목의 기사로 1937년 <아틀랜틱 먼슬리>지에 게재한 내용을 엮어 펴낸 1941년 「바닷바람 아래서」라는 책을 필두로, 1951년 7월 레이철은 「우리를 둘러싼 바다」를 출간했는데, 이 책은 그해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으며 86주 동안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는 등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 책은 영화 대본이 되기도 했는데, 영화는 1953년 다큐멘터리 부분에서 오스카상을 받기도 했다.

1955년 가을에는 바다 생명들이 공존하며 살아가는 생태를 다룬 「바다의 가장자리」를 출간해 다시 한번 명성을 떨쳤다. 그 후로도 레이철은 「끊임없이 변하는 해변」(1957) 등 다수의 책을 집필했다.

 

DDT 유해성 입증한 「침묵의 봄」 집필

바다 세계 관련 저서를 통해 자연 세계의 아름다움과 환경인식의 중요성을 일깨우던 레이철 카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더욱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DDT 및 기타 살충제들에 대해서도 주목하게 되었다. 주변 곳곳에서 새를 비롯한 수많은 동물들이 이유 없이 죽어간다는 소식이 신문지상을 통해 전달되고 있음에도 미심쩍은 살충제 사용이 여전히 권장되자, 이를 막기 위해 레이철 카슨은 혼신의 힘을 다해 「침묵의 봄」을 집필하는 데 몰두했다.

 

드디어 1962년 화제의 책 「침묵의 봄」이 출간되자, 미 전역은 떠들썩해졌다. 이 책에서 레이철은 농업용 화학약품의 무분별한 사용으로 내성이 생긴 해충이 더 많이 양산될 것과, 먹이사슬 관계를 통해 인간의 체내에 축적될 경우 암과 신경계 질환을 유발하는 위험성에 대해 설명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죽음이 내린 ‘침묵의 봄’이 올 것이라는 엄중한 경고의 메시지를 던진다.

이 책은 예상 외로 큰 호응을 얻어 60만 부 이상이 불티나게 팔리고, 그녀의 용기에 찬사를 던지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대중적인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러자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환경자문위원회를 구성하여 레이철이 주장하는 바에 대한 사실 여부를 즉각 조사했으며, 그녀의 노력을 치하했다.

 

반면,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긴 화학제품 회사와 일부 과학자들은 전문 과학자들도 규명해내지 못한 내용을 제기하고 나섰다며 그녀의 논증을 비꼬기도 했으며, 즉각 이를 반박하는 「침묵의 가을」(살충제 사용 억제로 수확 없는 가을이 된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이 문제가 쟁점이 될수록 레이철 카슨의 「침묵의 봄」에 대한 설득력은 더해 갔다.

결국 1963년 4월 CBS 방송에서 제작한 ‘레이철 카슨의 침묵의 봄’이라는 특별 프로그램을 통해 그녀는 해박한 환경 지식과 확신에 찬 목소리로 비난 일색이었던 반대세력들의 억지 주장을 일제히 잠재웠다. 
 

환경운동의 초석이 된 「침묵의 봄」

레이철 카슨은 1964년 유방암으로 사망했지만, 「침묵의 봄」의 출간으로 살충제의 유해성이 입증되면서 미국에서는 본격적인 환경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1964년 의회는 야생보호법을 제정해서 무절제한 개발을 금지시켰으며, 1969년 닉슨 대통령의 환경보호법안의 제정으로 이어져 미 정부는 미국환경보호청(ETA)을 발족시켰다.

이듬해 ‘지구의 날(4. 22.)’이 탄생되는 쾌거를 거두었으며, 이를 기점으로 수질, 자동차 배기가스, 대기 등에 관한 수많은 환경 규제 법안이 제정되는 발판이 되었다.

 

결국 문제의 시발점이 된 DDT는 1972년 이후 미국 내 사용이 전면 금지되었다.

그 후 DDT에 내성이 생긴 해충을 제거하기 위해 함께 만들어진 디엘드린, 클로르데인, 헵타크로르와 같은 유기 염소계 살충제 또한 사용 금지되었다. 이를 발판으로 1970년대 중반부터는 프레온 가스가 오존층을 파괴한다는 주장과 이산화탄소의 증가로 온실효과를 부르는 지구온난현상에 대한 문제점도 거론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민간 환경단체를 비롯한 수많은 환경운동가들의 목소리가 세계 전역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21세기를 맞고 있는 오늘날 환경문제는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처럼 레이철 카슨이 용감히 세상을 향해 외친 「침묵의 봄」은 40여 년이 지난 오늘날의 세대들에게 살아 숨쉬는 봄을 맞이할 수 있게 해 준 환경운동의 초석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깨어있는 한 사람의 목소리가 수많은 생명을 구한 것처럼, 이제 인류는 또 다른 문제가 거론되고 있는 여러 분야에서 용기 있는 제2, 제3의 레이철 카슨의 탄생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金倫正 기자 / yjkim@magazinegv.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