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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보현산맥

*[환경신학] 자연, 인간, 종교

[20051015]

 

 

 

* 자연 ... 인간 ... 종교 *
------------------------ 길희성 ------------------------

 

1. 티베트의 오줌누기

 

티베트의 생태적 삶
얼마 전에 두 주일 동안 티베트를 여행하고 돌아왔습니다. 티베트는 지금 중국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티벳의 수도인 라사는 거의 중국사람들이 상권과 경제권을 다 쥐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곳은 중국 사람과 언어도 다르고 워낙 독특한 종교적 문화적인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주의 정권으로 소수 민족을 통합하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지금 티베트는 자치국입니다. 몇 차례 독립운동을 통해 유혈진압을 당하였습니다. 지금도 거기에 가서 달라이 라마(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로 59년 인도로 망명함)를 얘기하다가는 큰일납니다. 저도 사실은 티베트 불교 민족주의 현장을 보고 싶은 마음에 갔습니다만 은 달라이 라마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습니다.
그 곳에서 인상적인 것은 파텔라 궁이었습니다. 책에서만 보던 사원들을 보니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고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원들보다도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끝없이 드넓은 들판이었습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들판이 굉장히 아름답고 인상적이었습니다. 티베트는 평균고도가 4000m입니다. 고산지대이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손끝이 찌릇찌릇 하고 조금만 숨이 가빠도 아주 견디기가 힘듭니다. 또 워낙 높은 데니까 구름들은 산들의 허리를 감고 있습니다. 산이 구름 위로 보입니다. 그 곳 파란 하늘은 티베트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정말 무공해 하늘이지요. 그리고 들판에는 유채꽃과 같은 노오란 꽃이 쫙 펼쳐져 있고, 개울물이 흐릅니다. 그 산비탈 같은 곳에서 양떼들을 몰고 다니는 목동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인간의 탐욕을 자극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순수한 자연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예수님이 다니시던 유대 광야를 연상시키는 그런 광야였습니다. 티베트 사람들의 얼굴은 가난하면서도 그리 어둡지 않습니다. 더운 햇빛에 타 가지고 얼굴은 새까맣지만 친절하고 늘 미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난한 삶 속에서도 아름다운 심성을 가지고 사는 그들의 모습과 광야가 지금도 눈에 아른거립니다.
티베트로 들어가기 전 며칠 동안 네팔에 머무를 때의 일입니다. 네팔은 세계 최빈국중 하나입니다. 하루는 우리 일행이 탄 버스가 갑자기 멈추더라구요. 웬일인가 내려서 얘기를 들어본 즉 그 전날 새벽에 어느 운전사가 마을 사람을 치고 자동차는 내버려 둔 채로 도망을 갔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나와서 연좌데모를 하는 것이에요. 진상규명을 요구하면서 길을 점령하니까 열 몇 시간을 차가 통행을 못하는 거예요. 한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그 사람들의 공동체 의식에 내심 감명을 받았습니다.
차가 수백 대나 늘어서 있으니까 불편한 것은 말할 수 없죠. 결국 그 자동차의 주인이 - 운전사 말고 -나타났고, 철저한 진상규명과 보상을 약속 받고서야 해산했습니다. 그래서 여행을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가던 중 네팔 농촌의 모습을 직접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바신(풍요와 다산의 신) 사원 옆에 조그만 농가가 있길래 들렀습니다. 그 집 가족들과 사진을 찍고 돌아서는데 그 집 꼭대기에 붉은 페인트 같은 걸로 그린 십자가 모양이 있더라구요. 처음엔 그것이 십자가라는 생각을 안 했어요. 기독 신자를 만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차에 양떼들 옆에 지팡이를 들고 서 있는 예수님 사진이 있더라구요. '이건 틀림없이 신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크리스챤이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고개를 끄떡거리더라구요. 굉장히 반갑더라구요. 물어보고 싶은 말이 굉장히 많았는데 말이 통하질 않아 물어볼 수가 없었어요. 주위에 교회가 없는데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 예수 믿는다고 동네 사람들한테 구박받지는 않은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는 것이 그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만약 내가 여기에 와서 선교사를 하게 되면 이 사람들에게 어떤 그리스도를 전했을까, 그리스도의 의미를 어떻게 설명을 할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계속된 물음 끝에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  할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하긴 하지만 상당히 행복해 보였습니다.

살고 있는 집이 변소간인지, 집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게 살지만, 그들에게는 농촌 특유의 부함이 있고 풍요로움이 있었습니다. 제가 너무 이상적이거나 감상적으로 보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물론 가난은 나쁜 것이죠. 그들 사회에도 어떤 사회구조적인 억압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현대 문명을 만끽하는 이들의 삶과 너무도 대조적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비하면 그들은 아무 문제도 없을는지 모릅니다. 그들을 그대로 두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들은 최소한의 에너지를 사용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연에 대해서 아무런 폭력을 가하지 않고 말입니다. 티베트에서도 그랬듯이 여기서도 대소변을 아무 데서나 봅니다. 그래도 리사이클링이 되어 별로 냄새도 안 나고 더러운 지도 모르겠더라구요. 저도 티베트 여행을 하면서 아무 데나 오줌싸는데 도사가 되었어요. (웃음) 여하튼 광야인들의 가난, 한적함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였어요.
가난과 광야라는 것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옛날부터 수도자, 성인들은 가난과 광야를 벗삼아 살아 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그런 분 중에 한 분이셨습니다. 무언가 부족한 것, 텅빈 것, 그것에 그 나름대로의 채워짐이 있고 풍요로움이 있습니다. 도시 속에서 보는 도시빈민들의 비참함, 옹색함, 비인간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어요. 아무리 가난해도 광야에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에는 나름대로 아름다움이 있고 미소가 있습니다.  축제를 즐기는 것을 보면서 이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그리스도는 어떤 분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난을 퇴치하는 것도 중요한 것이겠지만 가난을 극복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는 될 수 없지 않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약 가난하다고 해서 무의미하게 사는 것이라면 인류역사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의미하게 살았어요. 우리가 가난을 극복한 것이 불과 20년 정도밖에는 더 되겠습니까?

 



종교와 소비문화
최근에 정부는 IMF 때문에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합니다. 그리고 요즘에는 경제가 너무 침체됐다, 산업기반이 붕괴될 것 같다며 소비를 장려하고 돈을 풉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모순이죠. 사실 졸라매라고 하면 우리 한국 사람들은 잘 졸라맵니다. 일본사람들도 지금 우리와 비슷한 경제 문제를 겪고 있는데 G7 국가들이 일본더러 하는 얘기가 뭐냐 하면 세금을 감면하고 소비를 늘리라는 겁니다.
일본 사람들도 경제 위기가 오면, 근검 절약하는데는 도사예요. 정부에서 걱정하는 것도 일리가 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아예 소비를 하되 합리적인 소비를 하라고 합니다. 말장난이에요. 안쓰는게 상책이죠. 합리적 소비를 하라는 건 우리 경제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것 아니겠어요. 지금 우리는 세계 경제에 편입되어 있어요. 우리 나라만 안 쓰고 안 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새로운 삶의 양식과 새로운 경제체제, 말하자면 성장의 경제학을 극복하고 뭔가 다른 경제학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사상적인 문제, 우리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 사고방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절대절명의 과제지요. 그러니 네팔이나 티베트 같은 데로 가서 우리 식으로 살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종교문제는 결국 사상의 문제입니다. 사고방식,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을 바꿔 가는데 있어서 종교가 일차적으로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대세계에서 종교가 과연 이 자본주의 시스템 - 온 세계가 지금 편입되어 거의 획일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이 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겠느냐 하는 것은 수수께끼입니다. 그래도 종교에 기대를 해야지 또 어디서 기대하겠습니까. 예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네팔이나 티베트 사람들처럼 살았습니다. 소박하게 자연의 한 일부로서, 자연 친화적으로 에너지 소비를 아주 극소화하고 대부분 큰 욕심 없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발전, 개발, 역사의 진보 때문에 그런 생활양식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이젠 그런 세
계로 돌아가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소박하고 전통적인 삶의 양식을 영원히 되돌아갈 수 없도록 바꾼 시스템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기독교가 그것입니다. 기독교가 가는 곳마다 액티비즘(activism), 삶의 의욕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삶의 목적을 설정해 놓고 그 목적을 향해 사람을 몰고 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 가진  특징입니다. 자연 속에 묻혀서 소박하게 자연인으로 살던 사람을 의식화해서 역사의식을 고취시킵니다. 사회적 진보, 자유, 해방의 이름으로 갈등을 조장하고 우상을 타파한다며 신령님들을 모셨던 조그만 신전들을 전부 파괴하고 조상들이 살았던 삶의 양식들을 뒤엎어 버립니다. 그렇게 해서 리고 신들이 부정되고 조상들이 부정됩니다. 자연 속에 살던 인간이 역사화 되고 수동적으로 살던 사람들이 능동적인 인간으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 나라 기독교인들도 그렇지 않은가요. 끝없는 욕망과 그 욕망을 성취해주는 그리스도, 발전의 그리스도, 목적 지향적인 그리스도, 기독교인들이 삶에 대해 일반인보다 훨씬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건 사실입니다. 물론 이런 것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가 근세 역사에서 민주주의를 달성하고  인권을 신장한 데는 많은 공헌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끝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기독교와 더불어 자본주의, 사회주의라는 이 거대한 역사의 실험은 한계에 이르지 않았나요.자본주의 가는 곳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자본의 논리 앞에서 남아나는 것이 없습니다. 문화도 자본의 논리가 들어가면 순수한 문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문화는 보이기 위한, 돈벌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고 관광상품화 됩니다. 티베트 불교를 보고 슬픔을 느끼는 게 그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려 하는데 옛날의 티베트 승려들이 가지고 있던 그런 불교는 아닌 겁니다. 우리 나라도 농촌에 축제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어디 끈끈한 공동체 의식에 바탕을 한 자발적인 민속행사가 있습니까. 또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불필요한물건에 대한 욕망을 자극합니다. 계속 생산하고 팔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경제를 돌려야 되니까 상품에 대한 그 욕구를 계속 자극하는 것이죠. 사회주의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역사는 완전히 억압의 역사이고, 조상들이 자연의 일부로서 소박하게 살았던 삶의 양식은 전부 파괴되었습니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산업화에 뿌리를 두고 잘 살고자 하는 점은 똑같아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이상의 세 시스템이 온 세계를 전부 휘저어놓은 영향을 받지 않은 그런 사회는 지금 없습니다. 아마존 어디 밀림지역에나 가면 있을까요? 거기도 개발을 한다고 해서 가만 내버려두지 않는 다죠. 어찌 보면 세 이데올로기는  인간을 닦달하는 이데올로기입니다. 인간을 닦달하고, 활동적인 인간, 능동적인 인간들로 만들어가는게 닮은꼴이에요. 기독교만 보더라도 조금 국한해서 말씀드리면 기독교는 인간이 정말 소박하게 자연의 일부로서 살던 삶의 양식을 원하든, 원치 않든, 타의든, 자의든 파괴한 것이 사실입니다.

 

종교적 체험과 자연의 탈 신성화
인간이 신을 어디에서 만났느냐, 신 체험을 어떻게 하느냐, 어디서 하느님을 만나는가를 보면 기본적으로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자연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원초적인 경험일 것입니다. 산과 강과 바다, 물, 불, 태양, 달, 초목, 돌. 이런 자연 속에서 인간은 하느님에 대한 관념을 가지게 되었고 성스러운 거룩한 실재, 어떤 힘을 느끼게 되었다고 봅니다.
두 번째는 신을 만나게 하는 그 장은 역사적 경험 속에서입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윤리적 관계 속에서 하느님을 깨닫게 하는 것이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전통입니다. 자연을 매개로 만나게 하는 것은 동양종교입니다.
세 번째는 인간의 내면, 마음, 심성, 혹은 양심을 통해서 하느님을  구하며, 끊임없이 자기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면서 참 자아를 만나고 자기의 영혼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그런 길입니다. 이것 역시 동양종교의 특징입니다. 힌두교, 불교, 요가가 그렇습니다. 유교에도 인간의 신성 속에서 우주적 진리를 체득하는 그런 전통이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에도 이 전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영혼을 소중히 여기고
영혼의 깊이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신비주의자들은 대개 이 길을 선택합니다.
이 세 가지 길 가운데 기독교가 취한 길은 역사적 종교, 역사적 신앙, 역사 지향적이고도 전향적인 종교임에 틀림없을 겁니다. 비교 종교학적으로 보면 그래요. 다른 종교하고 다른 게 뭐냐. 첫째 얘기가 많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이야기,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 제자들의 이야기, 잠언과 같은 철학적이고 깊은 통찰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어요. 역사적 갈등과 고통 속에서 울부짖으며 하나님을 만나는 이야기도 있어요. 굉장히 현실감 있는 종교이고 굉장히 역동적인 종교입니다. 성서 자체가 그래요. 젊었을 때는 그게 아주 좋았습니다. 지금은 저 뿐만 아니라 많은 신학자들이 그것 자체를 의심해 보고 있습니다. 인간을 의식화시키는 등 공헌한 것은 사실이지만 큰
죄를 범했구나 하는 생각을 해봐요.


사실 최근 구약 성서의 세계관 자체가 철저히 의문시되고 문제시되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소외되고 자연을 지배하게 만든 이데올로기의 뿌리가 구약성서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실 창조의 이야기 자체가 어찌 보면 자연을 탈 성화 - 자연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을 없애 버리고, 자연을 자연으로 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자연 속에서 신을 발견하던 그런 생각이 없어졌어요. 자연은 인간이 가지고 놀 수 있는 무대가 돼버렸어요. 자연 안에서 신을 발견해서는 안돼는 줄로 알게 되었지요. 그건 우상숭배라 생각하였기 때문이죠. 물론 창조신앙 자체가 인간을 자연의 노예로부터 해방 시켰습니다. 자연의 떳떳한 주인으로 만들었다는 얘기입니다. 어찌 보면 상
당히 해방적인 사건이었고 사상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상황에 비추어볼 때 자연과 하느님을 분리시킨 엄청난 원죄를 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 신약성서를 보더라도 자연은 억압적인 것이고 인간은 그로부터 벗어나고 해방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이 세계도 타락했고 그렇기 때문에 함께 고통 당하며 신음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세계 속에서 안주할 것이 아니라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신약성서 역시 탈 자연적이라 할 것입니다. 신약과 구약이 세계관이 많이 다릅니다만 자연에서 영성을 발견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신약도 결코 자연 친화적이지는 않습니다. "들에 핀 백합화"를 보자든지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하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자연을 사랑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하지만 극히 일부예요. 가톨릭의 영성은  지금
도 세상 안에, 사물들 속에 거룩한 것이 내재해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물질세계의 상징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Sacramental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 개신교는 사물들 속에서 하느님을 상기시켜주는 모든 상징체계를 다 없애 버렸어요. 우상이라고 파괴해 버렸어요. 건물도 그러니까 아주 그냥 이렇게 멋대가리 없는 건물들만 지어놓고 성전이라고 해요.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산업사회의 요구에  부응했습니다.

 

[길희성]

현재 서강대 종교학과 교수로 재직중.
주요 저서 : '환경과 종교(공저)', '인도철학사'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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