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新양산박

*보현3리(4) - 절골, 송정

fireball(2) 2022. 7. 28. 13:44

2006. 10. 23.
[山間信仰]

 

*보현3리*

 


 1) 절골마을

 

   ① 사찰과 마을

절골은 보현산 자락, 보현리의 마을 가운데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하는 곳이다.

절골이라는 명칭은 마을 윗쪽에 보현사가 위치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현재 27가구이며 월성이

의 동성촌락으로 알려진 곳이다. 거동사는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신라시대까지

찰(大刹)이었다고 전한다. 지금은 대웅전의 가구양식을 통해 그 단면을 이해할 수 있을 뿐, 퇴락하여

거의 화려함을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러나 절 주위에 흩어진 탑의 부서진 조각이나 집터의

흔적 등을 통해 작은 규모의 절 부속건물이 많았을 것이라고 한다. 특히 ‘기둥의 재목이 싸리나무이며,

굵은 칡넝쿨로 봇장을 걸었다’ 는 말을 통해 다른 사찰에 비해 규모가 크고 특이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절은 은해사의 말사이기는 하지만 다른 말사와는 달리 법당의 크기가 본사와 같을 정도인 것으로 보아 화려한 과거를 짐작할 수 있다. ‘보현사 밑에 있는 골짜기에 책, 종이가 엄청나게 쌓여 있었

다’,  ‘절에서 나오는 쌀뜨물이 멀리까지 흘렀다’, ‘절의 미나리깡이 20여마지기였다’ 는 등의 표현은 절의 화려했던 과거를 짐작할 수 있는 표현들이기도 하다.

 

이러한 절이 겪은 질곡의 역사는 ‘다래 몽두리속에 3번 들어갔다’ 는 향언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

 수 있다. 또한 거동사(巨洞寺)라는 명칭도 본래의 것이 아닐 것이라고 주지스님(賢修)은 말한다.

즉, 거동(巨洞)은 인근에서 가장 큰 마을이라는 뜻일 뿐이지 사찰의 이름으로는 부적합하며, 인근에는

현사라는 명칭의 사찰이 없는 것으로 보아 본래는 보현산에 위치한 보현사였을 것이라고 한다.

현재의 주지스님이 이곳으로 오셨을 때인 8년전까지만 해도 절 소유의 토지들이 등기되지 않았다는

으로 보아 절 소유의 토지들이 대부분 개인 소유로 넘겨졌을 것이라고 주지스님은 말한다. 마을 주

민들 사이에서도 ‘절 토지를 마을 사람이 서로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는 말이 전할 정도이다.

 

현재에도 마을 주민들은 매월 초하룻날이나 초파일 등 특별한 날이 되면 거동사를 찾는다고 한다.

그러나 가정신앙이나 동제에서 절과의 관련성은 찾을 수 없다.

 

 ② 가정신앙

  가정에서 행하는 신앙행위는 음력 이월과 시월에 집중적으로 행해졌지만, 지금은 행하는 집이 없다.

이월에는 영등을 모시기 위한 ‘바람 올리기’를 행하였다. 지금은 영동하는 집이 없다고 한다.

예전같으면 그믐날 집집마다 떡을 만든다고 하여 시끄러웠다고 한다. 시월에는 대부분의 집에서 안택(또는 ‘집안한다’ 고 한다)을 행하였다. 안택은 농사를 지은 후 별도로 제미(祭米)를 준비하여 두었다가

10월9일 또는 10일, 또는 보름날 가운데 좋은 날을 택일하여 행하였다. 이것은 집안에 재수가 있으라고

행하는 것이다.

 또한 각 집안에는 시준단지의 祭米를 갈아 채워 둔다. 시준단지는 ‘성주세존’을 모시는 것으로 신체를

별도로 준비하진 않지만 안택을 행할 때 또는 특별한 음식이 생겼을 때 일정한 방향(안방 실경이 있는 방향)을 향해 음식을 차려두고 절을 올린다.

 

③ 동제(洞祭)

마을 입구에는 제당인 굵은 괴목(둘레 420㎝)이 위치한다. 이 제당은 시멘트로 2층의 단을 만들어 두었

다. 높이 35㎝의 아랫단은 너비 310×170㎝ 정도, 지면에서 130㎝의 윗단은 너비 130×1000㎝ 정도이다.

목은 밉 부분에서부터 두 개의 큰 가지가 솟아나 있으나 한 가지는 枯死하고 다른 한 쪽의 가지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제의는 절골과 윗쪽에 위치하는 유산(현재는 4가구가 았으며 ‘유사이’라고도 부름)마을과 합동으로 행

한다. 주민들은 제의를 ‘동네 할배제사’라고 브르는 것으로 보아 제의의 대상신은 ‘할배’라고 부르는 남성신격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제의를 행할 때 밥 두 그릇을 준비하는 것으로 보아 부부신을 모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의는 본래 정월 열나흗날 행하였다. 그러나 지금부터 약 65년전인 1930년대 중반 무렵부터 삼월 삼짇

날(3.3)로 바뀌었다. 그 이유는 명백하지 않지만 삼짇날이 좋은 날이며 다른 마을에서도 변경하는 경우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관은 유사라고도 부르며 선정 시기는 2월 20일에 행한다.

선정방식은 마을의 모든 집에서 한 사람씩 참석한 자리에서 복인(服人)이 아니거나 대상자의 집안에 임신한 사람이 없는 경우, 즉 ‘맞뜩은 사람’ 가운데에서 선정한다. 제관은 본래 1인을 선정하였다. 그러

나 제관 선정이 어려워진 지금은 2가구씩 순번을 정해서 유사를 맡기로 하였다. 그래서 남편이 없는 집

에서는 부인 혼자서라도 유사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제관이 행해야 하는 금기의 정도에서도 변화를 가져왔다. 주민들은 ‘전에는 제관이 기

도 많이 드렸다’고 한다. 즉, 제관으로 선임되면 제의를 행한후 1년동안 ‘궃은일’ (상장례를 말함)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3달 동안만 긎은 일에 참석하지 않으면 된다.

선출된 제관은 2월 그믐날부터 목욕재계를 시작한다. 이것을 ‘정신 드린다’고 한다. 재계는 제의를 행

기 전날인 3월2일까지 매일 한차례 찬 물에 목욕하는 것이다. 금기는 3월 초하룻날 아침 일찍 제관의

 앞과 당나무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금줄은 외새끼에 소나무 가지를 꽂아

둔 것이다. 이 작업이 끝나면 제관은 아침 7시 버스를 타고 장보기를 하기 위해 영천장으로 향한다.

제관은 시장에서 마을사람과도 말을 할 수 없으며 장만 보고는 바로 집으로 돌아온다. 제수는 밥, 과일, 떡, 생선, 육류등이다. 밥은 제관집에서 사용하는 쌀 1되 정도로 두 그릇을 준비한다.

이것은 비록 제의의 대상신이 ‘동네 할배’로 표현되지만 대상신이 2위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밥은 제의를 행한후 제관이 먹는다고 한다. 과일은 사과, 배, 수박, 대추, 밤 등이며 떡은 시루채로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방앗간에 부탁하여 준비하면서부터 시루채로 사용하지 않는다. 생선은 조

기, 청어, 상어고기(돔배기), 게 등이 사용된다. 육류는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가 사용되며, 이것들

은 제수 가운데 경비가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인 관계로 일정한 양이 정해지지 않고 사정에 따라 사용

한다고 한다. 그러나 닭고기는 온마리를 사용해야 한다.

 

제수 준비에 사용 되는 경비는 동네 돈을 풀어서 사용한다. 그러나 마을 공동 재산인 ‘할배 논’ 1마지기

 있을 때는 여기에서 나오는 도조로써 제수를 푸짐하게 준비하였다고 한다. ‘할배 논’이 준비된 시기

는 알수 없지만, 어느 시기엔가 그것을 팔아서 동네 공동 경비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 후 제사를 행한후 소요 경비를 계산하여 집집마다 분배한다고 한다.

 제의는 삼월 삼짇날 아침 8시경 유사가 제수를 가지고 제당에 도착하여 진설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진설이 끝났을 때 쯤 집집마다 한사람씩(여성은 참석할 수 없음) 제의에 참석하기 위해 제당에 모인다.

이 때 집안에 유고가 있으면 참석할 수 없으며 불참하면 벌금, 즉 궐돈을 내야한다. 그러나 지금은 궐

을 내지 않는다고 한다. 제의의 절차는 집에서 행하는 기제사와 동일하다.

 

제사가 끝나면 주민들은 마을회관에 모여서 음복을 행한다. 이때에는 여성들도 모두 참여할 수 있다.

음복은 제수를 포함하여 제수와는 별도로 밥과 국, 또 다른 음식들을 푸짐하게 준비하여 하룻동안 먹

면서 즐긴다고 한다. 이 때에는 풍물을 치고 놀이도 하고 구걸을 하기도 한다. 풍물을 앞세우고 구걸

 할 때에는 집집마다 돈이나 쌀을 준다고 한다.

음복을 행하는 동안에 동네회를 진행한다. 이 때에는 제사에 소요된 경비를 계산하고 또한 유고 없는

람을 제관으로 미리 선정하여 둔다. 그러나 이 때 선정된 사람이 이듬해 제의를 행하기 전에 유고가

있으면 이듬해 2월 20일경 다시 제관을 선출해야 하며, 전년도에 선출된 사람은 그 다음 해에 제관이

된다.

 

 ※ 제보자 : 김조이(여,75세), 이윤대(여,80세),최분이(여,76세)

 

 

 2) 송정마을

 

  ①마을 개관

 이 마을은 하거천과 보현산 사이에 위치하면서 인근 마을에 비해 마을과 농토가 비교적 넓은 곳이다.

또한 방앗간이나 정류장, 농기계 수리센터 등 보현리 주민들의 농업과 생활에 필요한 제반 시설이 집중되어 있는 곳이다. 이 마을은 보현중학교가 위치한 곳으로 보현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10년전까지만 해도 이 마을은 60호 정도의 큰 마을이었다. 비록 큰 마을이기는 하지만 “처녀가 시집갈 때까지

쌀 3말을 못먹고 갔다”고 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빈곤한 상태였다.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봅철에는 버들강아지 싹, 칡뿌리, 소나무 껍질 등을 먹거나 이것으로 만든

개떡, 칠기떡, 개떡등을 만들어 먹었을 정도로 빈곤한 상태였다. 이러한 사정은 보현리 일대에서 모

두 동일한 사정이었다. 이 마을의 인구가 가장 많았을 때가 이 당시였다고 한다. 그래서 보현초등학교

와 보현중학교의 학생수가 가장 많았을 때였다.

 

그러다가 통일벼의 보급과 함께 비교적 넉넉한 상태를 유지했었는데 지금부터 약 10년전부터 사정이

전되었다. 1986~88년 사이에 발생한 소값파동은 주민들을 급격히 도회지로 이주하게 하였다. 그래서 그 시기를 중심으로 빈집이 많이 생겨나게 되고, 인구도 현재 27호로 줄어들었다. 이 집들은 모두

도시 사람들이 사 두었다. 이들의 성씨별 구성은 경주 김씨5, 월성 이씨5, 권씨 3, 김녕 김씨3, 경주 최

씨 2, 영천 이씨 1, 의성 김씨 1, 진주 강씨 1, 류씨 1, 진씨1, 윤씨1, 元씨1, 石씨1, 정씨1가구 등이다.

 

인근 마을들에 비해 비교적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이 마을의 생업은 주로 벼농사와 고추 및 과수

사이다. 사과는 약 15년전부터 소개되어 지금은 대추와 함께 논농사의 주재배 작물이 되었다. 밭의

경작물은 대부분 고추이다.

 

② 제의

제당은 둘레 323㎝(암), 280㎝(수)의 느티나무 두 그루가 2m 간격을 두고 구성되어 있다.

이 나무는 숫나무를 ‘할배’라고 하고, 암컷나무를 ‘할매’라고 부르며, 이들을 ‘당나무’(또는 당자나무)라

 한다. 또는 여름에 훌륭한 휴식공간으로 이용되기 때문에 ‘정자나무’라고도 부른다.

----- [下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