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新양산박

*보현2리(3) - 상가듬

fireball(2) 2022. 7. 28. 13:43

2006. 10. 23 // [山間信仰]

 

 

 

*보현 2리* 

 


1. 상가듬


  ① 마을 개관

  상가듬 마을은 음지마을에서 서쪽으로 하거천을 따라 약 3㎞정도 거슬러 올라간 기룡산 기슭에 위치한

다. 그러나 지금의 마을 위치는 본래 기룡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전에 있었던 마을의 위치를 주민

들은 “구터”라고 부른다. 기룡산 중턱에 위치하던 구터는 낮에도 범이 출현하기도 하였다고 할 정도로

험한 곳이었다고 한다. 마을이 한창 번성했을 때는 약 60호정도였지만, 10년전부터 주민들이 도시로 이주

해 나간 후 지금의 마을 규모는 25가구정도이다. 주민들의 연령분포는 가장 젊은 세대에 속하는 50대의

두 집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60대이상의 노인가구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농촌 해체현상을 실감할 수 있는

실정이다.

 

마을의 규모가 컷을 당시에는 마을의 자치적 규범의 준수를 위해 마을 어른들의 위상이 대단히 높았다

고 한다. 노인들은 마을 중앙에 위치한 동사무실에 밤낮으로 모여서 놀았다.

즉, 지금부터 10여년전까지만 해도 젊은 사람의 행실이 나쁘면 어른들이 불러들여서 꾸중을 하고, 때로

는 매를 치기도 하고, 심하면 동네에서 추방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젊은 사람들의 행실이

나쁘더라도 일체 간여하지 않는다고 한다.

마을 자체의 이러한 사회규범적 변화는 당제의 지속과도 관계가 있다.

즉 “세월도 하도 변동이 많아서 젊은 세대가 하는 걸 보니 부모가 죽어도 제사마저 안 지낼 것 같다”고 할

정도로 당제의 장래는 불투명한 편이다.

 

당시, 마을의 공간은 사회경제적으로 양분화되어 있었다.

그 기준은 기룡산에서 내려오는 개울물의 왼쪽(‘아랫마을’)과 오른쪽(‘윗마을’)이다. 윗마을은 현재 마을

의 공간 대부분을 차지하는 곳으로 소위 ‘밥술이나 먹고사는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20여호 되었던

아랫마을은 주로 ‘없는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래서 왼쪽의 ’거랑너머에 사는 사람들‘은 주로 품팔이나 농사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또한 이 기준은 줄당기기의 편가름 기준이면서, 풍년을 기원하는 상징의 기준이기도 했다. 즉, 윗마을이

이기면 풍년이 들고, 아랫마을이 이기면 흉년이 들었다는 것이다.

 

줄당기기는 주로 현재의 동사무실옆에 위치한 밭(지금은 빈 공터)에서 행하였다.

밭에서 행하는 줄당기기는 작은 줄을 사용하였으며(지름이 약 20㎝정도), 이것은 거의 매년 행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충효리, 자양면 사람들이 아래편으로, 정각, 자천면 사람들이 윗편으로 나누어서 큰 줄을

당기기도 하였는데, 이 때에는 마을 뒤의 논에서 행하였다. 또한 지금부터 약 60년전인 일제시대 때는 보

현2리인 송정마을앞 논에서 큰 줄을 당기기도 하였다.

 

마을의 사회적 규범이 약화된 지금도 등촉계는 지속되고 있다. 등촉계는 명칭은 전기가 보급되기 이전

에 등불로써 밤을 밝혀주기 위해 붙여진 것이다. 결성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아주 오래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마을에 흉사(喪事를 말함)가 있을 때 24명의 계원들은 모두 자신의 일과 같이 도와주는 상포계의

일종이다. 주민들이 도시로 대거 유출된 후 이 계는 해체되고, 그 후 마을에 남아있는 주민들끼리 20명을

다시 결성하여 지금까지 지속하고 있다.

 

마을은 기룡산을 등지고 위치한다. 이 산은 상기등 마을의 洞山이었다.

그러나 지금부터 10여년전에 주민을의 자녀교육을 위한 학비가 어려워서 외지 사람에게 매각하였다 그

당시 각 집마다 100만원씩 분배를 하고 남은 돈 400만원 정도를 마을 기금으로 적립하기도 하였다. 즉, 공

동재산을 해체하여 분배한 시기는 약 10년전에 마을의 주민들이 대거 외지로 유출되는 시기와 유사하다.

이 시기에 마을이 재구조화되는 시기로 추정할 수 있다. 기룡상은 주민들에게 땔감을 제공하는 터전이기

도 했다. 그래서 지금도 60대 이상의 주민들은 나무를 하던 때에 부르던 ‘후후야 갈가마구야 거리 갈가마

구야’, ‘계미년 보리 흉년에 메뚜기 뒷다리에 차여 죽은 우리 영감아’등의 노래가 당시를 기억하는 추억으

로 남아있다.

 

이 마을은 인근의 다른 마을들에 비해 가장 많은 밭을 소유하고 있다.

은 주로 현재 마을의 위치에서 윗쪽인 기룡산 자락에 위치하지만, 옮기기 이전의 마을 위치에 비하면

모두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 밭에는 콩, 서수, 보리 등을 재배하였으나 지금은 모두 고추를 재배하고

있다. 이 마을의 고추농사는 보현 1,2,3리에서 가장 많이 재배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논은 현재의 마을

과 하거천 사이에 위치하며 그 면적은 아주 적은 편이다.

그러나 이 논은 비옥하여 소출이 많은 편이라고 한다.

 

 마을의 세시풍속은 마을의 규모가 가장 컷을 시기에 가장 활발하게 행해졌다.

히 논농사와 관계된 풍속이 주를 이루었으며, 풀베기, 논메기, 써레수리(또는 써레치라고도 함)가 가장

중요한 노동관행으로 기억되고 있다. 비료가 널리 보급되기 이전에는 논농사를 시작할 시기에 풀을 베어

서 거름으로 사용하였다. 이 때 풀을 베는 작업은 적게는 20일~한 달까지 지속되었을 정도로 아주 힘든

노동 관행이었다. 이 작업을 할 때는 새벽에 아침밥을 먹고 집을 나서면 어두울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작업장은 기룡산에서 이루어지는데 산을 넘어가서까지 작업을 하였다. 이 때 일꾼들의 새참과 점심 해결

을 위해 부인들은 밥을 머리에 이고 작업장까지 운반하기도 하였다.

 

논메기는 가장 많은 노동력이 소요되는 작업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농사를 많이 짓는 집에서는 하룻동안 놉을 20명씩이나 할 때도 있었다.

이들이 낮에 논메기를 한 후 집에 돌아오면 논 주인은 국수를 준비해서 마을의 주민 모두가 먹었다고 한

다. 그리고는 소를 타기도하고 쇠(농악)를 치면서 쾌지나 칭칭나네를 외쳐 부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논메기 작업이 모두 끝나는 시기에는 논 주인의 소를 메어 놓으면 일꾼들은 새경을 받는다. 이 때

큰 머슴은 주인집의 마당에서 소를 타고 쇠도 치면서 하루동안 실컷 놀았다고 한다.

칠석 무렵이면 ‘써레수리’를 한다. 이것은 힘든 논농사 작업이 모두 끝나는 모두 끝나는 시기에 결실을 기

다리면서 술을 먹고 놀이를 하는 것이다. 이 때 소용되는 음식은 논 주인이나 살림이 넉넉한 사람들이 준

비한다. 또한 이것은 참가 성원들 사이에서 노동력의 차이가 있을 때 주먹보탬이를 한다는 의미도 있었

다. 즉, 농사 지을 때 힘이 약한 사람은 그 동안 힘 센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하여 이 때에 그

고마움의 표시로 술을 대접한다는 것이다.

 

 

② 제당과 대상신

  상가듬에는 윗당과 아랫당이 있었다. 즉, 옮기기 이전의 마을에서 모시던 기룡산 중턱에 위치한 제당이

윗당이며, 현재의 마을 입구에 위치한 제당이 아랫당이다. 이 두 당은 모두 느티나무 한 그루씩으로 구성

되어 있으며 이 나무를 ‘당수나무’라고 한다.

  그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그곳에서 모시던 제당을 현재 거주지의 제당과 합치게 된 것이 약 40년전에 행

해졌다는 사실로 보아 그리 오래된 과거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에는 무당을 불러서 굿을 한 후에

윗당의 대상신을 아랫당으로 모셔왔다고 한다.

  제당에 모시는 대상신은 산신령님이라고 한다. 즉 제의를 행하는 것이 ‘산신령님이 이 잔을 받고 동네를

편하게 해달라’는 뜻이라는 제보자의 말에서처럼 이 마음 주민의 삶은 산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음을 시

사하고 있다. 이러한 관련성에 대한 단면은 제의의 결과에 대한 주민의 인식에서 살필 수 있다.

 

  당제를 행할 때 깨끗하지 않게 잘못 모시면 범이 마을에 내려와서 짐승을 해치거나 흙이나 자갈을 퍼붓

는 등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또한 제의를 옳게 모시지 않은 해에는 사람이 잘 죽고 교통사고 등이 발생

하여 제사를 다시 모셨던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즉, 제의를 통해 살필 수 있는 산신령님은 범으로 형상

화하여 마을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섬겨야 하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