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보현산맥

*[천주교환경연대]'불탄 산은 울지 않는다'

fireball(2) 2022. 8. 24. 21:48

2006. 11. 28.
[천주교환경연대]

 

 

                                                                                     '불탄 산은 울지 않는다 ''  

가물면 가물수록 밑으로 내려가는 뿌리처럼 
불탄 산은 울지 않는다고 했다.
비전이 있기 때문이다.
비전은 멀리에 있지 않다.
위에 있지 않다.
바닥에 있다.
밑에 있다.
안 보이게 있다.
뿌리,
보이는 것들을 다 태우고도 살아남은 뿌리,
그것이 불탄 산의 비전이다.
뿌리로, 비전으로
바닥부터 다시 시작한다, 우리의 저 산은.

사람들은 어느새 이순신의 성공에 눈이 멀기 시작한다.
그는 패배자다.
그는 잃은 자다.


그는 자기가 패배자라는 것,
잃은 자라는 것을 안다.
일본 수군에 패하지 않았다고 해서 패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는 좌초당한 인생이었다.
그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오늘 우리에게 기억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가 거둔 그 모든 성공은
그가 바닥을 알고 있어서 부여받은 선물이었다.
이 사실을 바로 기억하지 못하는 한,
이 시대에
이순신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듯이,
Vision은
낮은 곳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패배의 수렁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그들에게 Vision이 있다.
Vision은 그들에게서 시작될 것이다.
그러므로
비전 없이는,
민중의 마음 없이는
쉽게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그때
비판은 폭력이 되고 만다.
비전이 없으면 없을수록,
함께 바닥이 되는 것
그래서 비전에 참여하는 것
비전 되기에 동참하는 것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것이다.
비전이란 머리로가 아니라,
펜과 종이로가 아니라,
엎드린 등짝으로,
발 닦는 두 손으로,
강도 만난 사람을 태운 말을 인도하는 두 발로
잉태되고 양육되며 개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현자는 뿌리를 닮는다.
높은 데 올라가는 것을,
드러나는 것을,
번듯한 것을 탐하지 않는다.
전체를 볼 줄 아는 눈이 없이는 비전을 세울 수 없다.
뿌리가 될 수 없다.
바닥을 닮을 수 없다.
이순신이 바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체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족에게 칼을 겨누어서는 민족을 구할 수 없다는
민족 운명의 총체를 보는 선구적 안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 우리 교회에도
전체를 보는 눈이 필요하다.
이것 없이는,
부분적인 자기 체험을 전체화하면서
자기의 비전을 위축시키고,
진정한 비전을 질식시키고 만다.
전체적으로 보기 어려울 때,
닮으라.
뿌리를 닮아
밑이 되라.
가물면 가물수록
위가 아니라 밑을 찾는 뿌리를 닮아,
목마르면
밑으로 가라.

위로 치오르면
일찍 마른다.
일찍 썩는다.
밑으로 내리라.
거기서 예수를 만나라.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곳도 거기다.
예수는 위에 없다.
하느님은 위에 없다.
하느님이 안 보이는 까닭은 뿌리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그 뿌리 안에서
울어도 울고
그 뿌리 안에서
웃어도 웃자.
겨레여, 교회여, 세계 민중이여.

 

                                                                                       '불탄 산은 울지 않는다'